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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련자료/생활속 과학

국산 가전제품 성공기 - 작은 관찰력에서...

by 민서아빠(과학사랑) 2008. 8. 11.
 
LG전자 LSR연구소 김지희 선임연구원은 지난 2003년 러시아의 일반 가정에서 1주일간 숙식을 함께 하면서 현지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했다. 하루는 가족이 생일파티를 준비하는데 이상한 광경을 봤다. 파티가 열리기 3시간쯤 전에 가게에서 사 온 보드카를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어두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본 김 연구원은 “보드카를 냉동실에서 여러 시간동안 두면 걸쭉한 젤(gel)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데, 이때 마시면 입 안에 들어가면서 곧바로 녹는 느낌이 좋다”는 답을 들었다. 보드카는 차갑게 마시는 것이 제격인데, 한참 동안 냉동실에 넣어두고 기다리기는 불편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김 연구원은 이 사실을 보고서로 작성해 본사에 알렸다. 상품개발팀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냉동실 안에 보드카와 같은 술을 20~30분 안에 차갑게 해 주는 ‘급속냉각 공간’을 별도로 설치한 신제품 냉장고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러시아와 동구권 국가는 물론 최근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LG전자가 지난 1989년 설립한 LSR연구소가 제조업 신제품 개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LSR은 ‘life soft research’의 약자로 소비자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자세하게 연구, 신상품 개발의 기초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미국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세탁기 ‘트롬’도 미국인의 생활습관 연구에서 출발했다. 트롬 세탁기는 드럼식 세탁기이다. 드럼식은 여러 개의 돌출부가 있는 드럼(세탁통)의 안쪽에 물·세제·빨래를 넣고 옆으로 회전시켜 빨래가 돌출부에 걸려 올라갔다 떨어지는 충격에 의해 세탁을 하는 방식이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드럼식 세탁기는 유럽에서 주로 사용하는 제품이었고, 미국에선 각광을 받지 못했다. 대신 미국인들은 ‘봉 세탁기’를 주로 사용했다. 봉 세탁기는 세탁통의 중앙에 설치한 날개 모양의 막대를 좌우로 회전시켜 세탁을 하는 방식이다.

LSR연구소는 어떻게 하면 미국에서도 드럼세탁기를 판매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연구원들이 미국 가정의 빨래습관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우선 미국인이 대용량 세탁이 가능한 봉 세탁기를 주로 사용하는 것은 청바지 같이 싼 옷을 자주 갈아입어 빨래의 양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중간에 세탁기의 덮개를 열어 빨래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별도로 두고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었다. 반면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는 드럼세탁기는 용량이 적고 세탁기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없는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인들은 또 드럼식 세탁기에 대해 세탁성능이 약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조사결과에 따라 LG전자는 10~15㎏짜리 초대형 드럼식 세탁기 ‘트롬’을 개발했다. 세탁통 내부가 보이는 유리로 된 덮개를 설치해 세탁기를 열지 않고도 세탁과정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세탁기와 같은 모양의 건조기도 함께 개발했다. LG전자는 이 제품을 2005년 미국에 출시, 지난해 100만대를 판매했다. 올해는 200만대 판매가 예상되는 등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미국 생활용품 매장 홈디포에서 세탁기로는 최고가인 1600달러 대의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면서, “홈디포에서 판매되는 1000달러 이상 프리미엄 세탁기 중에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LSR연구소는 국내 소비자의 생활습관도 유심히 살펴본다. 김남훈 주임연구원은 지난 2005년 국내 가정을 방문해 주부들을 관찰했다. 주부들이 아침에 TV를 많이 보길래 곁에 앉아서 같이 TV를 봤다. 그런데 몇 주일 동안 아침방송에 계속해서 에어컨 필터에 세균이 많다는 내용이 나왔다. 주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그래, 바로 이거야”하며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에어컨을 깨끗하게 해주는 기능을 넣으면 잘 팔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LG전자는 올해 에어컨이 자동으로 필터 청소를 하는 신모델 ‘플래티넘 휘센 에어컨’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에어컨을 켤 때 나는 퀴퀴한 냄새를 없애는 기능도 갖췄다. 에어컨 내부에 남아있는 수분이 냄새의 원인이란 점에 착안, 에어컨을 끄면 바깥의 열을 이용해 내부의 수분을 증발시키도록 했다.

타임머신TV는 소비자들이 TV를 보다가 다른 용무로 자리를 뜨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개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제품은 TV를 켜면 자동으로 방송화면이 녹화하는 기능이 들어있다. 축구의 골인 장면이나 야구의 홈런 등 중요 장면을 놓친 경우 리모컨만 누르면 간단히 해당 화면을 감상할 수 있다. 최근 일본 등 해외에서도 비슷한 기능의 TV가 나오고 있다.

휴대폰 중에는 중동국가에서 많이 팔리는 ‘메카폰’이 유명하다. 세계 어디에서나 이슬람 성지인 메카(Mecca) 방향을 표시해 주고, 하루 5번의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메카폰을 개발, 13억 이슬람인들 사이에 호평을 받았다. 이는 이슬람인들이 매일 5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을 관찰한 결과였다.


휴대폰에 동그란 다이얼을 장착한 ‘아카펠라폰’ 아이디어는 SLR연구소 연구원들이 일과 후에 대학가 음악클럽에 갔다가 얻었다. 디스크 자키가 흥을 돋우기 위해 음악 중간중간에 전축 판을 긁어 ‘삑~삑~’ 소리를 넣는 것을 보고, 이를 음악전용 휴대폰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카펠라폰의 다이얼을 손끝으로 돌리면 효과음이 나오고,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 사이사이에 효과음을 넣어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편곡을 할 수 있다.

휴대폰 카메라를 개발 할 때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해외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한 결과다. 서승교 선임연구원은 “같은 인물 사진을 찍어도 한국·일본 소비자들은 얼굴이 희게 나오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유럽 사람들은 얼굴이 붉게 나오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보고는 LG전자가 2004년에 출시한 100만화소 카메라폰에 반영됐다.

소비자를 장기간 관찰할 때에는 카메라를 이용하기도 한다. LSR연구소는 3년 전 북미지역 40여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 주민들이 냉장고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냉장고 위쪽의 냉동실보다 아래쪽의 냉장실 문을 더 자주 열고 닫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LG전자는 냉동실과 냉장실의 위치를 바꾼 냉장고 신제품 ‘프렌치 디오스’를 개발, 미국시장을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LSR연구소의 이철배 소장은 “LG전자의 에어컨·TV·냉장고·세탁기·휴대폰 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면서 소비자들을 관찰·연구하는 기능이 더욱 중요해 졌다”고 말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전자제품은 일본 제품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국산 제품이 세계 1~2위에 오르면서 ‘이제는 무엇을 따라 신제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닥쳤다.

“소비자에게서 해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소비자가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자세하게 관찰해 불편한 점을 하나씩 개선해 가는 거죠.”

소비자 관찰은 신제품뿐만 아니라 기존 제품의 품질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한다. ‘TV 컬러 조정’이 대표적이다. 정은숙 선임연구원은 2003년 유럽의 가정에 설치된 LG전자 TV를 보다가 화면이 다소 차갑게 보이는 것을 느꼈다. 보고를 받은 LG전자 기술팀은 수개월에 걸쳐 이유를 분석한 결과 조명 방식의 차이로 인한 것임을 찾아냈다.

당시 국산 TV의 컬러기준은 직접조명이 대부분인 국내 실정에 맞춰 청색이 다소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내수용이나 수출용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이 만들었다. 하지만 유럽인이 가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간접조명 아래서는 청색을 강조한 TV는 차가운 느낌을 준다는 것을 새로 발견했다. LG전자는 이후 유럽·중남미 등 간접조명을 주로 사용하는 지역에 수출하는 TV에는 청색을 약하게 사용하고 있다.

LSR연구소는 소비자 일상생활을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한다. 연구원들의 전공이 디자인·심리학·경영학·사회학 등으로 다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석사이상 고(高)학력자가 70% 이상이고, 여성 인력이 절반에 이르는 것도 특징이다. 소비자 행동을 연구, 다양한 방법으로 트렌드를 찾아낸다. 해외 소비자 연구를 위해 연구소 인력의 10~20%는 항상 출장 중이다.